▼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역사 - 1편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역사 (1)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
1901년부터 모든 영국 왕비들의 대관식 왕관을 장식했던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현재 카밀라 직전 마지막 왕비인 퀸마더(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친)의 왕관에 박힌 채 영국 런던 탑에서 전시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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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탈취하는 데 있어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댈하우지 후작(시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격됨)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코이누르의 점유는 그 지역(펀자브)의 합병만큼 중요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로 코이누르에 강하게 집착했으며, 라호르 조약에 코이누르의 소유권 이전을 포함시켜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도 존재했는데요. 영국 언론들은 코이누르가 영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기쁘게 전하면서도 그것을 강탈하는데 큰 역할을 한 댈하우지 후작에 관련해서는 권한을 남용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여왕에게 선물될 코이누르는 동인도 회사의 선물이지, 자신만의 영광을 추구하는 어떤 허영심 많은 사람의 선물이 아니라며 후작의 오만함을 저격했죠. 한마디로 너무 나댄다(?)는 거예요...ㅋㅋ
동인도 회사까지 여왕에게 코이누르를 선물할 때 그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댈하우지 후작은 회사 내 그 누구도 영국을 위해 다이아몬드를 확보하는데 일조하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굴욕적으로 회사의 주장을 받아들였죠. 비록 직접 여왕에게 코이누르를 선물하는 건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보석을 위한 안전한 루트를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라호르에서 뭄바이 항구까지 수백 마일을 이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죠. 후작은 아내가 만든 염소 가죽 주머니에 코이누르를 담은 후 자신이 직접 보석을 운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거의 두 달 동안의 긴장 끝에, 땀에 푹 젖은 가죽 주머니 속 코이누르는 마침내 뭄바이에 도착했습니다.
코이누르는 댈하우지 후작에 의해 그의 조카인 램지 대위에게 맡겨졌고, 이후 영국 선박 메데이아 호에 비밀리에 실린 채 영국으로 운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순탄치 못했는데요. 메데이아 호 내부에 콜레라가 발병해 두 명이 사망하고, 얼마 안 가선 강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반으로 쪼개질 위협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코이누르가 배에 있는 걸 몰랐던 선원들은 그저 파도가 잠잠해지길 기도했겠지만, 코이누르의 저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램지 대위는 아마 두려워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메데이아 호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영국 또한 혼란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위독했던 삼촌 케임브리지 공작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였는데, 전직 군인 출신 로버트 페이트란 남성이 여왕의 마차에 다가가 지팡이를 내려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왕이 쓴 보넷을 짓누를 만큼 강한 타격이었고, 이로 인해 여왕의 이마엔 피가 흘렀는데, 이 공격은 여왕을 향한 암살 시도 중 유일하게 직접적인 부상을 입힌 공격이었습니다. (범행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음) 여왕의 부상 소식은 코이누르가 영국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나란히 신문에 실렸고, 이는 코이누르의 저주에 대한 소문을 부채질하는 기폭제로 작용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코이누르의 이전 소유자들이 겪었던 불행에 대해 한참 동안 떠들어댔죠.
이틀 후,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이마에 눈에 띄는 상처가 남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전달되었지만, 여왕은 그리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전날에 절친한 친구이자 전 총리인 로버트 필이 사망했기 때문이었죠. 그날 여왕의 일기엔 '걸출한 인물이자 매우 유능한 정치가이자 매우 좋은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코이누르는 단지 몇 문장만 차지했을 뿐이었죠.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코이누르를 나에게 선물했다. 그 다이아몬드는 라호르에서 왔고, 샤 슈자로부터 그것을 탈취한 란지트 싱의 소유였었다. (...) 불행히도 투명한 세공이 안 돼있으며 커팅 상태도 좋지 않다."
당시에도 코이누르는 유명했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851년 개최된 만국박람회였습니다. 만국박람회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이 주도한 대형 프로젝트였는데요. 박람회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수정궁 내부에는 영국과 전 세계에서 온 약 13,000개의 진귀한 물건들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가 바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였습니다. 언론이 생동감 있지만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코이누르의 전설과 이전 소유자들의 불행했던 삶을 조명하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직접 보기 위해 박람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방문객 대다수가 비대칭의 투박한 형태에, 반짝임도 적은 코이누르의 실물에 큰 실망감을 표현했습니다. 코이누르의 명성이 실추되자 앨버트 공은 황급히 보석 주변에 가스램프와 거울을 설치하고, 진홍색 천을 두르는 등 빛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재구성된 디스플레이는 새로운 관중을 끌어모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의 평가는 냉정했죠. 코이누르의 실망스러운 데뷔와는 반대로 만국박람회 자체는 크게 흥행에 성공했으며 코이누르는 그 성공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버트 공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코이누르의 외관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고, 저명한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과 상의한 끝에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연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852년, 영국 왕실 보석상인 가라드의 공장에서 앨버트 공과 웰링턴 공작의 감시 아래 코이누르의 커팅이 시작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세공 업체의 장인인 부르상저가 파견돼 직접 커팅을 했으며, 총 38일간의 작업 기간 끝에 마침내 코이누르는 완벽한 대칭과 눈부신 반짝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크기는 186캐럿에서 105.6캐럿으로 크게 줄어들어있었죠. 오늘날 전문가들은 어느 하나의 결점도 다이아몬드의 빛을 저해시켰을 거라며 부르상저의 커팅은 어쩔 수 없는 작업이었다고 동의하지만 당시 앨버트 공은 거의 반토막이 나버린 코이누르에 크게 동요했습니다. 그는 언론과 대중이 이 커팅 작업에 대해 비난을 할까 걱정했죠. 그러나 정작 이 소식이 알려졌을 땐 대부분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코이누르가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저 멀리 인도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코이누르의 직전 소유자인 어린 마하라자 둘레프 싱이었죠. 그는 여전히 존 로그인 부부의 보살핌 아래 있었으며, 자발적으로 시크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만큼 '영국인'처럼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코이누르를 빼앗은 영국에 대해 원망보다는 호기심을 가졌으며, 15살이 되자 영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죠. 빅토리아 여왕의 허락하에, 1854년, 둘레프 싱과 보호자인 존 로그인 부부는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잘생기고,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우아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가진' 어린 마하라자에 매료되었고, 그에게 큰 호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혈우병 때문에 항상 형제들에게 뒤처져있던 레오폴드 왕자를 소외감이 느껴지지 않게 어깨에 올린 채 같이 게임을 하는 그의 배려에 크게 감동했죠. 여왕은 둘레프 싱을 가족의 일원인 것처럼 대우했으며, 아끼던 화가 빈터할터에게 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잡는 둘레프 싱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짐을 느꼈습니다. 어린 왕에게서 강탈한 코이누르. 여왕은 코이누르를 점유한 방식에 대해 사적인 우려를 가지고 있었죠. 빈터할터가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여왕은 로그인 부인을 조용히 불러내 둘레프 싱이 코이누르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며칠 후 둘레프 싱과 승마를 하던 로그인 부인은 지시대로 코이누르에 대한 그의 감정을 물어보았고, 둘레프 싱은 호기롭게 "조약에 의해 보석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을 때, 난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이제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여왕 폐하의 손에 그것을 맡기고 싶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이 놀랄 일은 아닌 게, 나니아 연대기 속 에드먼드가 하얀 마녀가 준 과자에 홀린 것처럼 당시 둘레프 싱은 여왕이 보여주는 호의에 심취한 상태였고, 그녀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둘레프 싱을 찾아가, 보여줄 것이 있다고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둘레프 싱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여왕이 보여 준 상자를 쳐다보았죠. 그곳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코이누르를 집어 든 둘레프 싱을 보며 로그인 부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그의 얼굴에서 억압된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죠. 한동안 방안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둘레프 싱은 결심한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보석에서 시선을 거두고, 여왕에게 다가갔습니다. 로그인 부인은 그가 보석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둘레프 싱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에 코이누르를 부드럽게 쥐여주며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폐하에게 코이누르를 바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기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보석은 그가 손에 쥐여주기 전부터 여왕의 것이었지만 굳이 이런 퍼포먼스를 한 이유는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 마음 편해지자고 한 거겠죠😠 한평생 영국인들 울타리 안에서 세뇌교육을 받은 15살의 아이가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하겠어요??
정말 웃긴 건 저런 퍼포먼스하기 1년 전에 이미 코이누르를 수용할 수 있는 보석들이 만들어져있었다는 거예요. 둘레프 싱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미 착용하기로 결심했던 거죠. 위 초상화 속 왕관(서클렛)과 브로치가 바로 코이누르를 수용하기 위해 왕실 보석상 가라드가 만든 보석들입니다. 왕관의 중앙 크로스 파데와 브로치엔 코이누르를 안전하게 고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 언제든 쉽게 탈부착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둘레프 싱과의 만남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죄책감을 덜었는지 코이누르를 자주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855년 파리 방문에서도 코이누르가 부착된 왕관을 착용했죠. 아쉽게도 왕관으로 착용한 사진이나 초상화는 따로 없는 듯해요.
1861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인 앨버트 공이 사망하자 빅토리아 여왕은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후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평생을 검은색 드레스만 입었으며 화려한 보석들도 멀리했죠. 그러나 코이누르 하나만은 예외로 두었고, 이는 여왕의 수수한 미망인 옷차림에 유일하게 눈에 띄는 보석이 되었습니다. 근데 빅토리아 여왕 본인은 코이누르의 착용을 싫어했다고 해요. 큰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왕은 "인도에 대해, 내가 그 나라들을 정복하는 걸 얼마나 반대했는지 나보다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없을 거야. (...)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이고, 우리에게 그 어떠한 득도 없기 때문이란다. 너도 내가 코이누르의 착용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니."라고 코이누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어쩔 수 없이(?) 코이누르를 착용하는 동안, 코이누르의 저주는 남성에게만 해당된다는 또 하나의 미신이 더해졌습니다. 여왕 직전 소유자인 둘레프 싱의 사망 소식은 사람들이 신과 여성만이 코이누르를 착용할 수 있다고 더욱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둘레프 싱은 '영국 정부에 계속 순종하는' 조건으로 이만 오천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약 40억 정도)의 연금을 받으며 영국 귀족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 어린 시절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던 합의 조건들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속 의심의 씨앗이 그를 점점 더 자기파괴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크 왕국의 마지막 마하라자는 술과 여자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쓰다 결국 파산했으며 1893년, 파리의 허름한 호텔에서 무일푼으로 홀로 사망했습니다. 코이누르의 소유자들이 겪었던 비극의 역사에 둘레프 싱의 비참한 죽음이 추가되면서 더더욱 남자는 만져서는 안 될 보석이라고 여겨지게 되었죠. 빅토리아 여왕 또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코이누르를 여성만이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과 함께 크라운 쥬얼리(중요도 높은 왕실 의식용 보석들)에 포함시켰습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 사후, 다음 왕인 에드워드 7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왕비는 코이누르를 브로치로 사용했다가(왼쪽 사진), 대관식에서는 코이누르가 박힌 왕관을 착용했습니다(오른쪽 사진). 알렉산드라 왕비를 시작으로 영국 왕비들의 대관식 왕관엔 항상 코이누르가 부착되기 시작되었죠.
다음 왕비인 메리 왕비 또한 1911년 대관식에서 코이누르가 박힌 왕관을 착용했습니다. 이 왕관은 나중에 카밀라 왕비의 대관식 왕관으로 재사용되는데요. 원래 왕비의 대관식 왕관은 항상 새로 제작했었는데, 이번 대관식에서 카밀라는 그냥 만들어진 걸 착용하기로 한 거죠. 기존 왕관을 다시 사용한 경우는 18세기 조지 2세의 부인인 캐롤라인 왕비 이후로 처음이라고 해요. 최근 영국 경제가 안 좋아서 대관식도 사실 안 열릴 줄 알았기 때문에 왕관 재사용이 그리 놀랍진 않네요ㅎㅎ
메리 왕비는 대관식 왕관에서 아치와 벨벳을 제거한 채, 위 사진처럼 서클렛 형태로 자주 착용했습니다.
위 사진처럼 가라드가 만든 브로치가 아닌 다른 보석에 코이누르를 부착하는 경우도 있었죠! 1936년, 아들 조지 6세가 즉위하자 메리 왕비는 코이누르를 며느리인 엘리자베스 왕비(퀸마더)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왕비(퀸마더) 또한 대관식 날 코이누르가 박힌 새 왕관을 착용했습니다(오른쪽 사진). 이날은 완전한 형태의 크라운이 착용된 유일한 경우였으며 이후 퀸마더는 메리 왕비처럼 아치와 벨벳을 제거한 채 서클렛으로 착용하기 시작했죠.
1952년, 조지 6세가 사망하자 왕세녀인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국왕은 대관식 날 써야 될 왕관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굳이 코이누르도, 새 왕관을 만들 필요도 없었죠. 다음 왕비가 없는 관계로 코이누르는 계속 퀸마더의 왕관에 부착될 수 있었으며, 딸의 대관식 날, 퀸마더는 자신의 왕관 서클렛을 그대로 착용했습니다(위 사진). 그러나 60년대 이후부터는 코이누르와 관련된 외교적 압박으로 인해 더 이상 서클렛을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2002년 퀸마더의 장례 기간 동안, 퀸마더의 왕관이 관 위에 놓였는데, 위 모습이 코이누르가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이제 코이누르를 보고 싶으면, 런던탑 쥬얼 하우스 내에서만 관람이 가능하죠.
코이누르는 퀸마더의 왕관에 그대로 부착된 채 다른 역대 왕비들의 왕관들(코이누르가 있던 자리는 크리스탈로 대체)과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요. 종종 관람객들은 생각보다 작은 코이누르의 크기에 놀라곤 합니다. 특히 같은 진열장에 전시되고 있는 거대한 사이즈의 컬리넌 다이아몬드들과 비교해 볼 때 말이죠.
실제로 코이누르는 세계에서 90번째로 큰 다이아몬드일 뿐이지만, 그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높은 인지도와 유명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유명세는 19세기 초 시크 왕국의 란지트 싱의 소유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죠. 이후 영국 언론들이 확인되지 않은 전설과 이야기들을 덧붙이며 일종의 홍보 활동을 펼쳤고, '저주받은 보석'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끌린 영국 대중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더욱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라는 단일한 지위에 오르기도 했죠. 한때 코이누르에 필적했던 다른 거대한 무굴 다이아몬드들이 잊혀진 것과는 반대로, 코이누르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인도에서 가져온 가장 유명한 약탈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코이누르를 둘러싼 외교적 분쟁이 오늘날에도 계속 지속되고 있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 심지어 탈레반까지 코이누르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 바탕에는 코이누르가 거쳐간 무굴 제국,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시크 왕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반환은 절대 불가하다고 영국은 못을 박았지만 이제 자국보다 힘이 세진 인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굳어진 보석의 착용은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기 때문에 코이누르는 더 이상 착용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특별히 유명하지 않았던 다이아몬드를 세계적인 지위에 올려놓은 영국의 마케팅(?) 덕분이라고 볼 수 있죠. 한마디로 그들 자신이 초래한 결과인 거예요.
국제적인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번 대관식에서 카밀라 왕비 또한 코이누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코이누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른 보석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할 수 있을까요. 코이누르가 누구의 것인지, 어느 나라에 반환해야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식민 지배라는 아픈 역사를 지닌 한국인으로서 영국의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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