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부터 모든 영국 왕비들의 대관식 왕관을 장식했던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현재 카밀라 직전 마지막 왕비인 퀸마더(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친)의 왕관에 박힌 채 영국 런던탑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관례대로라면 카밀라 왕비 또한 이번 대관식에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왕관을 착용해야 했죠.
하지만 대관식 날 카밀라가 착용한 왕관엔 코이누르 대신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전 자주 착용하던 하트 모양 브로치(오른쪽 사진)가 중앙에 장식돼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내외부적 압박 때문이었는데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엔 어떤 역사가 있길래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걸까요?
18세기 초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 인도는 전 세계 유일의 다이아몬드 생산지였습니다. 인도 하천에 따라 넓게 분포한 충적토에서 수많은 다이아몬드들이 발견되었죠. 대부분이 작고 자연스러운 팔면체 모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주 드물게 달걀 크기에 맞먹는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였죠. 우리가 알고 있는 코이누르는 커팅 후 105캐럿으로 줄어든 위 사진 속 모양이지만, 원래는 190캐럿 정도의, 지금과는 달리 반짝임은 거의 없는 투박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13-14세기 발견 추정)라는 명성답게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인도 무굴 제국에서 시작한 길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언제, 어떻게 무굴 제국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코이누르가 중세 델리 술탄국을 거쳐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에 의해 무굴 제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보고 있죠. 그러나 실제로 델리 술탄국이나 무굴 제국의 기록에서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에 대한 100% 확실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종종 언급되는 무굴 다이아몬드에 대한 기록도 이것이 코이누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코이누르의 기원에 대한 역사들은 그저 증거가 빈약한 설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코이누르가 언제, 어떻게 무굴 제국을 떠나게 되었는지는 1740년대 중반 페르시아의 역사가인 무함마드 카짐 마르비가 저술한 역사서에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이는 코이누르에 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이기도 했죠. 역사서에 따르면, 1739년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전리품으로 '공작 왕좌'를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공작 왕좌'를 장식하던 수많은 보석들 중 하나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였다고 합니다.
'공작 왕좌'는 우리에게 타지마할로 유명한,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의 또 다른 역작이었습니다. 1628년 왕위에 오른 샤 자한은 정의로운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전설 속 솔로몬의 왕좌에서 영감을 얻은, 장엄한 왕좌의 제작을 명했습니다. 무굴 제국이 여러 세대에 걸쳐 모은 각종 보석들과 1톤이 넘는 순금이 사용돼 완성된 '공작 왕좌'는 사람들에게 코란 속 솔로몬의 왕좌를 연상시켰다고 합니다. 왕좌가 얼마나 화려했던지, 제작 비용만 해도 타지마할 건설의 서너 배가 들었으며 제작 기간은 무려 7년이나 걸렸죠. '공작 왕좌'라는 이름답게 왕좌의 상단부에는 2마리의 공작 장식이 있었는데, 코이누르는 그중 하나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명성과는 다르게 코이누르가 당시 특별히 유명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무굴 제국은 다이아몬드보다 스피넬과 루비 같은 붉은색 보석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죠.
100여 년 뒤인 1738년, 페르시아의 무자비한 왕 나디르 샤가 무굴 제국의 수도를 침공했고, '공작 왕좌'를 비롯한 수도 내 금은보화들을 모조리 약탈해갔습니다. 어찌나 탈탈 털었는지 보석들을 이동시키는데 코끼리 700마리, 낙타 4,000마리, 말 12,000마리가 필요할 정도였죠. 당시 역사를 기록한 페르시아 역사서에 의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처음으로 코이누르(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는 뜻)라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디르 샤는 어느 시점부터 공작 왕좌에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떼어내 자신의 완장 장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치 다이아몬드의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그의 편집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디르 샤의 광기는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아들 레자 콜리의 두 눈을 뽑아버린 후 극에 치달았죠. 1747년, 결국 몇몇 신하들이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나디르 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암살 소식은 즉시 나디르 샤가 경호를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장군, 아흐마드 칸 압달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충직했던 그는 곧바로 자신의 부대 내 병력들과 함께 침입해오는 반역자들을 제압하며 왕실 하렘을 지켰습니다. 나디르 샤의 가족은 자신들을 보호해 준 아흐마드에게 감사의 표시로 보석들을 선물했는데, 그중에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물 공세는 계속 곁에서 보호해달라는 마음이 담겨있었겠지만 아흐마드는 코이누르로 장식된 완장을 착용한 채 자신의 부대와 함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습니다.
아흐마드는 고향에 도착한지 몇 달 만에 파슈툰족 대표들에 의해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두라니 제국의 초대 국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진주 중의 진주라는 뜻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로 알려지게 되었죠. 그의 제위 기간 동안 두라니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현대 아프가니스탄의 경계를 훨씬 넘어 페르시아의 니샤푸르부터 카슈미르, 펀자브까지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전투에서 거의 패하지 않았지만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피부병이었죠.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말년에 온몸을 잠식하는 피부병으로 고통받다 1772년 사망했습니다. 사망원인이 정확히 밝혀진 바 없어 피부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되고 있죠.
아들 티무르 샤가 왕위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물려받았지만,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1793년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아마도 독살)을 맞이했습니다. 왕위를 놓고 티무르 샤의 24명의 아들들은 내전에 돌입했고, 최종 승리는 다섯 번째 아들인 자만 샤가 차지했습니다.
자만 샤 통치 하의 두라니 제국은 점차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죠. 1800년, 자만 샤는 결국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뜨거운 바늘에 두 눈이 찔려 영원히 앞을 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배다른 형제이자 라이벌이었던 마흐무드 샤의 작품이었죠. 다만 마흐무드 샤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자만 샤가 두 눈이 멀기 전 몰래 감옥의 진흙 벽 속에 코이누르를 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두라니 제국의 지배자가 된 마흐무드 샤는 자만 샤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자만 샤와 어머니는 다르지만 친형제처럼 지냈던 14살의 슈자 왕자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수색대를 피해 피신에 성공한 슈자 왕자는 복수를 다짐하며 때를 기다렸고, 1803년, 마침내 마흐무드 샤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왕이 된 샤 슈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장님이 된 채 감옥에 갇혀있던 형 자만 샤를 풀어주는 일이었죠. 자만 샤는 감사의 표시로 코이누르를 어디 숨겨두었는지 알려주었지만, 그 장소에 갔을 땐 이미 누군가 다이아몬드를 가져간 뒤였습니다.
코이누르가 몹시 갖고 싶었던 샤 슈자는 부하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코이누르를 찾아내라고 닦달했고, 얼마 안 가 이슬람 율법학자의 책상 위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주 어이없게도 코이누르는 그것이 다이아몬드인지 몰랐던 한 율법학자에 의해 문진으로 사용되고 있었죠. 그렇게 원했던 보석을 손에 넣은 샤 슈자는 선대 지도자들처럼 코이누르를 완장으로 착용했고, 이는 1808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최초의 영국 특사였던 엘핀스톤 경이 남긴 기록에도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그가 보석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였다. 그의 진짜 드레스는 금과 보석으로 만든 큰 꽃들로 장식된 초록색 튜닉이었다. (...) 팔에는 커다란 에메랄드 팔찌들이, 다른 쪽에는 많은 다른 보석들이 있었는데, 팔찌 중 하나는 바로 코이누르였다."
그러나 엘핀스톤 경의 방문 직후, 왕위를 빼앗겼던 마흐무드 샤가 다시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패배한 샤 슈자는 황급히 두라니 제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망명길에 오른 샤 슈자가 항상 지니고 있었죠. 하지만 그걸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시크 왕국의 초대 마하라자인 란지트 싱이었습니다. 란지트 싱은 샤 슈자에게 우호적인 메시지를 보내 그를 자신의 궁전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지만 원하던 보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샤 슈자가 오히려 그에게 아내를 맡긴 채 바로 자신을 도와줄 군대를 찾으러 떠나버렸거든요.
하지만 란지트 싱에게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군대를 찾아 나선 샤 슈자가 카슈미르에서 억류를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죠. 남편을 살리고 싶었던 샤 슈자의 아내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조건으로 그에게 남편을 구출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거래에 동의한 란지트 싱은 1813년 카슈미르에 원정대를 보내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샤 슈자를 구출해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샤 슈자가 코이누르를 넘기길 거부하자 이에 분노한 란지트 싱은 샤 슈자를 가택연금 시킨 뒤 온갖 방법으로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아들까지 고문했죠. 결국 이에 굴복한 샤 슈자가 란지트 싱에게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넘겼지만, 란지트 싱은 처음에 그가 자기를 속이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즉시 라호르(시크 왕국의 수도) 내 모든 보석상들을 모아 코이누르가 맞는지 검사를 맡겼죠. 보석상들이 코이누르가 진짜라며 그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다고 말하자 란지트 싱은 매우 기뻐하며 샤 슈자에게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란지트 싱은 코이누르를 처음에는 터번 장식으로 사용했다가 이후 완장으로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색 보석을 선호했던 무굴인이나 페르시아인들과는 달리 란지트 싱은 다이아몬드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중요한 날에는 항상 코이누르를 착용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난공불락 요새로 악명 높았던 고빈드가르 내 보안 금고에 숨겨두었죠. 란지트 싱이 단순히 다이아몬드의 가치만으로 코이누르에 집착했던 것은 아녔는데요. 두라니 제국이 점령했던 인도의 영토들을 대부분 되찾은 란지트 싱에게 있어서 코이누르는 그저 평범한 다이아몬드가 아닌 두라니 왕조의 영광이었고, 이제 그 영광은 란지트 싱의 시크 왕국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보석이었습니다.
란지트 싱의 치세 동안 시크 왕국은 세력을 넓히는 영국에 대항해 강력한 왕국으로서의 독립을 지켜냈으며, 사람들은 그런 란지트 싱을 '펀자브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또한 같이 유명해졌는데요. 이는 시크 왕국을 방문한 영국인들이 코이누르를 착용한 란지트 싱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중에는 1838년 인도 총독이었던 오빠 오클랜드 백작을 따라 시크 왕국을 방문했던 에밀리 이든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코이누르)은 매우 컸지만,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라는 다소 실망스러운 감상과 함께 당시 직접 만난 란지트 싱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꽤 지쳐 보였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펀자브의 사자에겐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았죠.
죽음이 임박하자 란지트 싱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종교 시설에 기부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다이아몬드가 왕이 아닌 시크 왕국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신하들에 의해 묵살당했죠. 후계자인 카라크 싱 또한 보석이 절대 수도를 떠나선 안된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결국 란지트 싱의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고, 1839년 코이누르는 시크 왕국의 제 2대 왕에 즉위한 카라크 싱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란지트 싱 사후 시크 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죠. 여자와 술을 좋아해 국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던 카라크 싱은 즉위한지 103일 만에 폐위를 당했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나우 니할 싱도 즉위한지 1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나우 니할 싱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시크 왕국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습니다. 처음 주도권은 나우 니할 싱의 엄마 찬드 카우르가 쥐었는데, 그녀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며느리가 아들을 낳을 거라며 그동안 자신이 왕좌에 있겠다고 선언했죠. 그러나 며느리는 사산을 했고, 그 소식이 라호르 내 퍼지자 공포와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우 니할 싱의 이복 형이었던 쉐르 싱이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찬드 카우르는 그 즉시 수도를 봉쇄했지만 쉐르 싱은 7만 명의 군대와 함께 라호르를 포위했고, 성문을 열도록 압박했습니다. 결국 찬드 카우르는 자신과 며느리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쉐르 싱은 코이누르로 장식된 완장을 착용한 채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약속을 깨고 찬드 카우르와 그 며느리를 암살했죠. 그러나 쉐르 싱도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채 안 됐을 때 그의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맙니다. 그렇게 란지트 싱이 사망한 후 4년 동안 3명의 왕이 죽었습니다. 1843년 12월 끝까지 살아남아 왕위를 차지한 사람은 란지트 싱의 막내아들 둘레프 싱이었는데, 그의 나이 고작 5살이었죠.
부드럽고 통통한 팔에 코이누르를 묶은 둘레프 싱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너무 어렸던 그는 어머니와 신하들의 의견에 그저 따를 뿐이었죠. 1845년 시크 왕국은 영토를 넘보는 영국에 대항해 먼저 공격을 가했으나, 왕국 내 영국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는 등 내부 분열이 심해 결국 패배했습니다. 이후 영국은 라호르 조약이란 불평등 평화협정을 강요했는데, 요구 목록 상단에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있었습니다. "란지트 싱이 샤 슈자에게서 탈취한 코이누르라는 보석은 라호르의 마하라자(둘레프 싱)에 의해 영국 여왕에게 양도될 것이다." 영국에 의해 어머니와 분리돼 보호자 없이 홀로 있던 어린 왕은 겁에 질린 채 조용히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49년, 그렇게 펀자브와 코이누르는 영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둘레프 싱은 폐위를 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했던 인도 총독 댈하우지 후작은 코이누르를 포함한 시크 왕국의 보물 관리를 스코틀랜드 의사 출신 존 로그인에게 맡겼습니다. 보석을 관리했던 시크 왕국의 한 관리인은 존에게 코이누르를 넘기며 "코이누르는 내 가족에게 치명적인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난 (다이아몬드의) 저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는 거의 바라지도 못했죠."라고 보석에 깃든 어둠의 힘을 경고했습니다. 존은 폐위당한 둘레프 싱의 양육 또한 맡았는데, 어린 왕은 그의 11번째 생일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작년 생일에는 팔에 코이누르를 착용했었어." 보석, 왕위, 가족을 잃은 소년을 보며 존은 아마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소유한 이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코이누르의 저주. 이제 그 저주는 보석을 뺏어간 영국을 향하게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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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역사 (2) - 카밀라가 105캐럿 다이아몬드 왕관을 착용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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