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왕의 상징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제국 왕관)은 '성 에드워드의 사파이어', '흑태자의 루비', '스튜어트 사파이어', '엘리자베스 1세의 진주' 등 역사가 깊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보석 각각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할게요💎
'성 에드워드의 사파이어'는 왕관 맨 꼭대기 십자가에 박혀있는 보석으로, 영국 왕실 컬렉션 속 그 어떤 보석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파이어는 1042년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왕의 반지에 있던 보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어요~
어느 날 한 거지가 우연히 에드워드 왕을 마주쳤고, 왕에게 적선을 베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신앙심이 깊어 참회왕이라고 불렸던 에드워드 왕은 거지를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 자신의 사파이어 반지를 대신 건네주었죠.
거지의 정체는 성 요한으로 밝혀졌고, 왕의 도움에 고마움을 느낀 그는 2명의 영국인 순례자에게 도움을 주며 자신이 받았던 반지를 왕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왕에게 돌아온 사파이어 반지는 1066년 왕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가 1163년 왕의 관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돼 왕실 보석으로 추존되었다고 합니다.
전설이기에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제국 왕관> 십자가에 박힌 '성 에드워드 사파이어'는 그 이름처럼 참회왕 에드워드의 반지에서 온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죠.
두 번째로 소개해 드릴 보석은 왕관 정면 크로스 파데에 부착된 '흑태자의 루비'입니다. 왕실 보석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특별히 좋아하는 보석 중 하나라고 언급한 적도 있죠. 170캐럿의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흑태자의 루비'는 사실 루비가 아니고, 스피넬인데, 예전 감정 기술로는 루비와 스피넬의 구분이 힘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붉은색 스피넬을 루비로 오해했다고 해요. 나중에야 위 보석이 스피넬인 게 밝혀졌지만, 오랫동안 '흑태자의 루비'로 불렸기에 계속 그렇게 불리고 있죠.
하지만 진짜 루비인 부분도 있답니다. 스피넬의 윗부분을 보면, 색깔이 다른 원석이 스피넬에 박혀있는 게 보이시죠? 원래 저 부분에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진짜 카보숑 루비로 구멍을 매웠다고 해요. 저 구멍은 헨리 5세(1386-1422)가 그의 투구를 장식하고 있던 '흑태자의 루비'에 깃털을 꽂아 넣으려고 뚫었다는 설이 있어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흑태자의 루비' 속 유일한 루비 부분을 보고 있으면 꽤 재밌다며 "깃털이 투구를 장식한 보석에 박혀있었다는 건데, 좀 엉뚱해도 당시 관습이었던 것 같다."라고 언급했죠.
이 루비 스피넬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367년 스페인 카스티야의 국왕 돈 페드로는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 에드워드 왕자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에드워드 왕자는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로, 늘 검은 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후세에 흑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인물이죠. 흑태자 에드워드는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경험이 있는 명장이었고, 그의 도움을 받은 돈 페드로 왕은 반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돈 페드로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자신이 그라나다의 왕으로부터 탈취한 거대한 사이즈의 루비를 답례로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붉은색을 지닌 루비는 에드워드 왕자의 별명을 따 '흑태자의 루비'로 불렸죠.
1415년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는 자신의 투구에 '흑태자의 루비'를 부착하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사이, 왕은 적군인 프랑스 알랑송 공작의 공격을 받게 되죠. 공작은 전투 도끼로 왕의 머리를 정확히 가격했는데, 헨리 5세의 투구에 장식된 단단한 '흑태자의 루비'가 충격을 완화해 왕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약 70년 후, 영국 리처드 3세 또한 반란군을 진압할 때, '흑태자의 루비'로 장식된 투구를 착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고, 리처드 3세는 결국 적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반란을 성공시킨 리치먼드 백작이 헨리 7세로 즉위하며 새로운 튜더 왕조의 시작을 알렸죠. '흑태자의 루비'는 이후 튜더 왕관을 포함 여러 왕관을 거쳐 오늘날 <제국 왕관>의 중심을 빛내주고 있습니다.
<제국 왕관>에서 항상 같은 자리, 맨 앞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흑태자의 루비'와는 반대로, 자리를 뺏긴 보석도 있는데요. 바로 위 초상화 속에서 '흑태자의 루비' 바로 밑에 있는 '스튜어트 사파이어'가 그 주인공입니다.
104캐럿의 '스튜어트 사파이어'는 1688년 영국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할 때, 같이 갖고 간 보석으로, 나중에 그의 아들 찰스 에드워드가 물려받았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찰스는 사파이어를 동생 헨리에게 넘겼고, 당시 요크의 추기경이었던 헨리는 자신의 미트라(주교가 의식 때 쓰는 모자)에 '스튜어트 사파이어'를 붙였다고 해요. 헨리가 사망하자 그의 유산 집행인은 스튜어트 왕조의 유산 몇 개를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조지 4세에게 전달하지만, '스튜어트 사파이어'는 그 유산에 속하지 않았죠.
스튜어트 왕조의 보석들을 되찾길 원했던 조지 4세는 이탈리아 상인 보넬리를 고용하여 행방을 알 수 없는 유물들에 대한 조사를 명합니다. 조사를 진행하던 보넬리는 '스튜어트 사파이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베니스 상인으로부터 사파이어를 구입해 왕에게 전달하였죠. 조지 4세는 보넬리가 보낸 사파이어가 '스튜어트 사파이어'라고 확신했다고 해요. 그렇게 1807년 영국 왕실로 돌아온 '스튜어트 사파이어'는 30년 뒤 <빅토리아 여왕의 제국 왕관>에 부착됩니다.
1214년에 작성된 기록에 의하면, 스코틀랜드 왕국의 알렉산더 2세는 사파이어를 하나 소유하고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은 알렉산더 2세의 사파이어가 '스튜어트 사파이어'의 기원일 거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영국 왕실 재단은 제임스 2세부터를 정설로 여기는 듯해요...!
1909년, '스튜어트 사파이어'는 컬리넌 다이아몬드에 밀려 <제국 왕관> 뒤쪽으로 옮겨지죠.
<제국 왕관> 상단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진주가 달려있습니다. BBC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관에 달린 진주를 만지며 "원래 엘리자베스 1세의 귀걸이였는데... 보석은 생물과 마찬가지다. 여기 이렇게 달려있는 걸 보니 슬프네."라고 언급했죠.
사실 이 진주는 엘리자베스 1세의 것이 맞느냐 아니냐 논란이 좀 있는데, 영국 왕실 재단의 설명 위주로 말씀드릴게요.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명문,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귀족 가문은 피렌체 공화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는데, 그중 한 명이 카트린 드 메디치입니다. 그녀는 1533년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하였고, 삼촌인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7개의 진주를 결혼 선물로 받았습니다.
1558년 카트린의 아들 프랑수아 왕세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부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메리 생후 6일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태어나자마자 왕위에 올랐음)과 결혼했습니다. 카트린은 삼촌이 준 최상급의 진주들을 메리에게 줄 정도로 예쁘고, 똑똑한 며느리를 매우 총애했다고 해요
그러나 순혈 왕족이었던 메리는 귀족 가문 출신 시어머니 카트린을 시종일관 무시했고,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냉랭해져갔습니다. 그러다 1560년, 메리의 남편 프랑수아 2세가 일찍 사망해버리면서 카트린은 눈엣가시였던 메리를 스코틀랜드로 쫓아내듯이 보내버리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는 단리 경과 재혼하여 아들 제임스를 낳았지만, 보스웰 백작과의 간통, 남편 살해 혐의로 폐위당해 감금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엘리자베스 1세는 망명을 요청한 메리를 받아주죠. 그러나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어 여왕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국 메리를 유폐하였지만 이동의 자유만 없을 뿐 메리는 연금을 받으며 나름 안락한 생활을 제공받았습니다.
메리는 진주광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카트린이 준 진주를 4000파운드에 팔았습니다. 오늘날 <제국 왕관>에 달려있는 진주들이 이때 엘리자베스 1세가 구입한 진주들로 추정되고 있어요.
영국 왕실 재단의 설명에 따르면 <제국 왕관>에 달린 총 4개의 진주 중 적어도 2개의 진주는 19세기까지 영국 왕실 소유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데, 그러면 나머지 2개는 엘리자베스 1세의 것이 맞을까요? 이것도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서.. 적어도 영국 왕실 재단은 엘리자베스 1세의 진주들이 맞다고 보는 듯해요.
▼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제국 왕관)의 자세한 역사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지막 왕관 |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 (1) | 영국 왕실 보석
1952년 왕위에 올라,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96세의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국 왕실에서 여왕은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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