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이 첨탑 구조의 뾰족한 스파이어들로 장식된 위 티아라는 중간에 딸기잎을 본뜬 다이아몬드 장식이 있어 <딸기잎 티아라>라고 불리는데요. 귀여운 이름과는 달리 <딸기잎 티아라>는 소유한 자에게 항상 비극이 따랐기 때문에 저주받은 티아라로 불립니다. 오늘은 <딸기잎 티아라>와 관련된 슬픈 비극의 역사를 알려드리려고 해요.
빅토리아 여왕은 1840년 앨버트 공과 결혼해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습니다. 앨버트 공은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이자 자식들에겐 자상한 아버지였고, 종종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보석을 여왕이나 딸들에게 선물하고는 하였습니다. (프란츠 빈터할터가 그린 위 초상화에서 여왕이 착용한 에메랄드 티아라도 앨버트 공의 선물이었죠)
1861년 앨버트 공은 곧 결혼할 셋째 앨리스 공주에게 티아라를 선물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티아라의 제작을 왕실 보석상 가라드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앨버트 공은 완성된 티아라를 보지 못하고, 그해 12월 장티푸스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 티아라와 관련된 비극의 시작이었죠.
앨버트 공의 사망 몇 달 후 열린 앨리스 공주와 헤센 루트비히 공자의 결혼식은 '가장 슬픈' 결혼식이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상복을 입은 빅토리아 여왕은 결혼식 동안 울음을 참아야만 했고, 앨리스의 형제들도 헤센 대공국으로 떠나는 앨리스 생각에 우울해했죠.
결혼식 후 앨리스 공주는 완성된 <딸기잎 티아라>를 가지고, 남편 루트비히 공자와 함께 헤센 대공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공자비가 된 앨리스는 여러 행사나 공무에서 아버지의 선물을 자주 착용했습니다.
앨리스 공주가 1867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위 사진을 보시면 <딸기잎 티아라> 윗부분에 있는 스파이어들이 원버전에 비해 적게 나열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볼 때 경우에 따라 스파이어들을 떼고 붙일 수 있는 것 같아요...!
1873년 앨리스 공주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곧 뇌출혈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살 수도 있었을 그런 사고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혈우병 환자였기 때문에 피가 멈추지 않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죠. 헤센 대공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78년 첫째 딸 빅토리아를 시작으로 가족이 하나둘씩 디프테리아에 감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스 공주와 둘째 딸 엘리자베트를 제외한 온 가족이 감염되었고, 앨리스 공주는 최선을 다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간호했습니다. 그러나 막내딸 마리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앨리스는 또 한 번 겪는 자식의 죽음에 매우 상심했으나 아직 돌봐야 할 아이들과 남편이 있었기에 힘을 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앨리스 공주도 결국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었고, 아버지 앨버트 공이 사망한 12월 14일 같은 날에 35살의 이른 나이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딸기잎 티아라>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죠. 앨리스 공주의 티아라를 착용하기에는 아직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이에요.
빅토리아 여왕은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손주들을 항상 신경 썼고, 특히 큰 손녀 빅토리아가 아빠 루트비히 대공을 도와 궁정을 이끌 수 있도록 자주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헤센 대공가 아이들은 건강히 장성하였고, 1884년에는 첫째 빅토리아(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와 결혼), 둘째 엘리자베트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의 5남인 세르게이 대공과 결혼)가 결혼하면서 헤센 대공가를 떠났습니다. 4년 뒤 셋째 이레네(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와 결혼)까지 결혼하면서 헤센 대공가에는 후계자인 넷째 에른스트와 막내 알릭스가 남았죠.
1892년 헤센의 루트비히 대공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에른스트가 그 뒤를 이었고, 아직 미혼이었던 그에게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친손녀인 빅토리아 멜리타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더키(빅토리아 멜리타의 애칭)와 에른스트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적극적인 주선과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1894년 결혼을 하였습니다.
더키의 사촌이었던 러시아 니콜라이 황태자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에른스트의 여동생인 알릭스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알릭스는 처음에 청혼을 거절했지만 먼저 러시아로 시집갔던 언니 엘리자베트 대공비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고 청혼을 받아들였죠.
헤센 대공비가 된 더키는 시어머니 앨리스 공주의 소유였던 <딸기잎 티아라>의 새 착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살의 어린 나이였던 더키는 왕족의 의무를 버거워했고, 남편 에른스트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향도 너무 달랐던 둘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져만 갔죠.
더키와 에른스트의 사이를 간신히 이어주던 끈은 바로 하나뿐인 외동딸, 엘리자베트였습니다. 에른스트는 아내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지만 아내를 몹시 닮은 딸에게는 한없이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었죠. 더키도 딸을 사랑했지만 남편이 딸에게 애정을 쏟을수록 그녀 자신은 비참함을 느꼈고, 결국 남편과의 이혼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그들의 이혼을 반대했고, 절대적인 여왕의 말에 더키는 결혼 생활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키는 1896년 열린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헤센 대공가의 안주인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첫사랑이었던 키릴 대공(블라디미르 티아라의 원주인 미헨 대공비의 아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감정이 다시 느껴졌지만 더키는 통치 군주의 아내였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았죠. 다시 마음을 다잡았던 더키에게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습니다.
더키와 그 자매들은 러시아 여대공인 엄마의 주도적인 교육 아래 자유롭게 성장하였으나 후계자였던 오빠 알프레드는 가족과 떨어져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서일까요. 알프레드는 온갖 문제를 일으키며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있었고, 결국 1899년 부모님의 은혼식 날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즉사하지 않았지만 다음날에 사망하였고, 하나뿐인 오빠의 죽음에 더키는 큰 충격을 받았죠. 그녀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아빠 에든버러 공작(빅토리아 여왕의 차남)도 후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빠와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에 더키의 심신은 지칠 때로 지쳐있었고, 남편인 에른스트는 그런 그녀에게 어떠한 애정도 주지 않았습니다. 1901년 그들의 이혼을 반대하던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자 더키는 곧바로 이혼 신청을 하였습니다. 에른스트는 자신의 결혼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였죠. 그렇게 헤센 대공가 안주인 자리는 비워졌고, 더키가 착용하던 <딸기잎 티아라>는 에른스트가 다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외동딸 엘리자베트의 양육은 더키와 에른스트가 반년씩 맡기로 하였습니다.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줄 정도로 에른스트는 엘리자베트를 몹시 아꼈죠. 그러나 1903년 엘리자베트는 장티푸스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의 죽음으로부터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에른스트는 "나의 작은 엘리자베트는 내 삶의 햇빛이었다."라고 회상하며 딸을 평생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에른스트는 1905년 졸름스-호헨졸름스-리흐의 공녀 엘레오노레와 재혼하였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티아라였던 <딸기잎 티아라>를 선물하였습니다.
재혼한지 며칠 안되었을 때 에른스트는 매형인 세르게이 대공이 끔찍하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한순간에 남편을 잃은 둘째 누나 엘리자베트를 걱정함과 동시에 불안정한 러시아 제국의 황후였던 여동생 알렉산드라(알릭스)에 대해서도 염려하게 되죠. 당시 알렉산드라 황후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로 인해 어렵게 낳은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고, 그 사실로 인해 죄책감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기운은 온 유럽을 덮쳤고, 결국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독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이었던 에른스트는 독일의 편에서 싸웠죠.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그는 여동생 알렉산드라 황후와 그 가족들이 볼셰비키에 의해 잔인하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총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에른스트 그의 안위도 불안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종전되면서 독일의 수많은 공국들이 공화정으로 전환되었고, 헤센 대공국 또한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에른스트는 헤센의 대공위에서 폐위당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에른스트는 둘째 누나 엘리자베트 대공비가 볼셰비키에 의해 폭탄으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고, 평생 종교활동과 봉사에 충실했던 누이를 추모하였죠.
두 누이와 대공위를 잃었던 1918년이 저물고, 긴 시간이 흘러 1937년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에른스트의 차남인 루트비히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결혼을 미뤄야 했죠.
에른스트와 엘레오노레의 큰 아들 게오르크 도나투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목상의 헤센 대공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게오르크의 아내는 그리스 공주이자 필립공(엘리자베스 여왕의 부군)의 누나였던 세실이었습니다.
세실은 대공비가 되기 전 아픈 시아버지를 대신하여 남편과 함께 조지 6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영국을 방문하는 며느리에게 엘레오노레는 자신의 <딸기잎 티아라>를 빌려주었죠. 그로부터 얼마 뒤 에른스트가 사망하자 헤센 가문의 안주인이 된 세실은 <딸기잎 티아라>를 물려받았습니다.
넷째를 임신 중이었던 세실은 시아버지의 사망으로 미뤄졌던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나이가 어렸던 막내딸 요한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벨기에 오스텐더 근처 공장 굴뚝에 날개가 충돌하면서 추락했고,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날은 59년 전 앨리스 공주의 막내 마리 공녀가 사망한 날이었죠. 출생한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세실 곁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비행기 이륙 후 세실이 갑작스럽게 조산을 하였고, 응급상황에 조종사가 무리하여 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당시 비행기 안에는 세실과 남편 게오르그뿐만 아니라 아들 루트비히, 알렉산더, 시어머니 엘레오노레와 유모, 남편의 친구였던 아이센바흐 남작, 4명의 승무원이 탑승했었습니다. 추락 후 일어난 폭발로 인해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유일하게 상처 하나 남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세실이 시동생의 결혼식에서 착용하기 위해 가져간 <딸기잎 티아라>가 비행기 잔해 속의 보관함 안에서 상처 하나 없이 발견되었죠. 헤센 대공가의 추락 사건은 <딸기잎 티아라>가 저주받은 티아라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게오르그의 남동생 루트비히 부부는 세실이 본가에 남겨두었던 조카 요한나를 입양했지만 안타깝게도 요한나는 추락 사고 이후 2년도 채 안 되었을 때 수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의 헤센 대공위를 물려받은 루트비히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1967년 세상을 떠나면서 헤센 대공국의 남계는 그렇게 끊기게 되죠.
현재 <딸기잎 티아라>는 헤센 가문의 재단이 소유하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이 티아라를 착용할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딸기잎 티아라>를 소유했던 헤센 대공가의 사람들은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었죠. 이 티아라는 정말 저주받은 티아라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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𝑯𝒆𝒔𝒔𝒆 𝑺𝒕𝒓𝒂𝒘𝒃𝒆𝒓𝒓𝒚 𝑳𝒆𝒂𝒇 𝑻𝒊𝒂𝒓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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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딸기잎 티아라>의 소유자
1. 앨리스 공주
2.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1878년 상속)
3.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엘레오노레 (1892년 상속)
4. 게오르크 도나투스/ 세실 (1937년 상속)
5. 루트비히 (1937년 상속)
6. 헤센 가문의 재단 (1967년 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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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딸기잎 티아라>의 착용자 (소유자 제외)
1. 빅토리아 멜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