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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ON

퀸마더의 그레빌 보석 컬렉션 (1) - 막대한 부로 왕족을 끌어모았던, 마가렛 그레빌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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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마더 (딸 엘리자베스 여왕과 이름이 같아서 구분하기 쉽게 퀸마더라고 불려요)

2차 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3년, MHG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검은색 양철 트렁크가 버킹엄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왕비(퀸마더) 이름 앞으로 보내진 트렁크 안에는 위 사진 속 티아라+귀걸이+목걸이+브로치를 포함한 방대한 보석 컬렉션이 차곡차곡 들어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단 한 사람이 '애정 어린 마음으로' 왕비에게 남긴 보석들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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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그레빌

왕비에게 자신의 컬렉션을 선물할 정도로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졌던 인물은 바로 당시 제일가는 갑부이자 영국 사교계를 이끌었던, 마가렛 그레빌 여사였습니다. 그녀는 에드워드 7세, 메리 왕비 등 로열 패밀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죠.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신분에 너그러웠던 영국이었음에도 그녀의 출신은 상류층과는 상당히 동떨어져있었는데요.

 

 

 

 

1863년, 마가렛은 가정부였던 헬렌 앤더슨과 양조장에서 짐꾼으로 일했던 윌리엄 앤더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진짜 아버지는 매우 부유했던 스코틀랜드 양조업자 윌리엄 맥이완이었죠. 마가렛은 맥이완의 사생아였던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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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윌리엄 맥이완  (우) 헬렌 앤더슨

맥이완은 미혼이었지만,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심지어 혼전임신으로 아이가 생겼다는 건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헬렌과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를 아빠 없는 아이로 손가락질당하게 할 수 없었던 그는 양조장 직원인 윌리엄 앤더슨에게 돈을 쥐여주고 임신 중이었던 헬렌과 함께 런던으로 갈 것을 지시했죠.

 

런던에서 헬렌은 마가렛을 낳았고, 윌리엄 앤더슨은 출생증명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 법적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둘의 성이 '앤더슨'으로 똑같았기 때문에 결혼 여부를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단 걸 노린 거예요. 임무를 완수한 윌리엄 앤더슨은 맥이완의 양조장 일터로 돌아왔으며 그 누구도 그가 마가렛의 '표면상' 친부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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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앤더슨, 1885년

한편 헬렌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조금 더 런던에 남아있다가 남편과 아버지를 일찍 여읜 안쓰러운 두 모녀로 딸 마가렛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맥이완은 헬렌과 마가렛을 몰래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그의 지원으로 헬렌은 하숙집을 운영하며 딸 마가렛을 키웠죠.

 

 

 

 

1885년, 58세가 된 맥이완이 마침내 오랜 시간 관계를 지속했던 헬렌과 결혼을 하면서 친딸 마가렛의 '의붓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결혼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아마 맥이완이 1880년 정계에 입문했고,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남들과 같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 작용한 듯해요. 또한 그가 재정적으로 보살피던 가족들이 그 무렵 다 세상을 떠나면서 부양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진 것도 한몫했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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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맥이완, 1887년

맥이완은 결혼 1년 뒤에 자유당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게 될 '의붓딸' 마가렛도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미혼이라는 사실은 누구와 결혼할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는데요. 1891년, 28살이란 다소 늦은 나이에 마가렛은 2대 그레빌 남작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로날드 그레빌과 결혼하였습니다. 불분명한 출신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맥이완의 유일한 상속녀라는 타이틀은 마가렛이 사교계에서 '상류층 남편'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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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그레빌과 마가렛

상류층 진입에 성공한 마가렛은 차기 남작부인 '마가렛 그레빌'로서 사교계 입지를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런던 자택에서 파티를 자주 주최하며 각계 저명인사들과 인맥을 쌓는데 집중했는데, 당시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7세도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죠. 마가렛은 왕세자의 정부인 앨리스 케펠과도 친해져 나중에 그녀의 딸과 손녀의 대모가 돼주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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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폴스덴 레이시 저택

1906년, 윌리엄 맥이완은 접대를 위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딸 부부를 위해 오늘날 가치로 천만 달러 이상인 폴스덴 레이시 저택을 인수했습니다. 그레빌 부인은 이 교외 저택을 근처 지나가는 군주나 마하라자(인도의 군주)가 하룻밤 머물고 싶어 할 만한 그런 고급스러운 저택으로 탈바꿈하길 원했죠. 이를 위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나섰는데, 작업엔 파리와 런던의 리츠호텔을 재설계한 건축가들이 고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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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폴스덴 레이시 저택 내부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7세가 폴스덴 레이시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자 그레빌 부인은 리모델링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당시 군주의 저택 방문은 매우 영애롭게 여겨졌거든요. 그러나 리모델링을 무사히 마치기 1년 전인 1908년, 갑자기 남편 로날드 그레빌이 4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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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빌 부인, 1900년경

로날드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시아버지 그레빌 남작의 후계 자리는 시동생 찰스에게 넘어갔고, 그레빌 부인은 결코 남작부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귀족이 될 바에야 맥주 파는 게 낫다.'라고 말하곤 했던 그녀지만 원래 돈에 관심 없다는 사람이 제일 돈에 미친 사람이잖아요ㅋㅋ 후계자가 된 시동생의 결혼식도 뉴욕 여행을 핑계로 불참했는데, 하필 얼마 안 있어 시아버지가 사망하고 시동생이 남작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더 미련이 남았을 거예요. 로날드가 18개월만 더 살았으면 마가렛이 가질 수 있었던 타이틀이었으니까요. 

 

남편의 죽음 이후 그레빌 부인은 미망인에게 기대되는 낮은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파티나 모임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았고, 가까운 친구들과 아버지와 함께 조용히 남편을 애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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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스덴 레이시를 방문한 에드워드 7세(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왕 바로 왼쪽에 앉은 여성이 그레빌 부인이에요), 1909년

그렇게 1년 후, 로날드의 죽음으로 미뤄졌던 에드워드 7세의 폴스덴 레이시 방문이 이뤄지면서 그레빌 부인의 사교계 복귀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특출한 사교계 여주인으로서 그레빌 부인은 자신의 접대 재능을 십분 발휘하였는데요. 그녀는 에드워드 7세의 측근들을 빠짐없이 파악해 초대 명단을 구성하였으며(앨리스 케펠은 항상 포함시키는 센스ㅎ), 대식가였던 왕의 성향에 맞춰 늘 최고의 음식과 와인을 코스별로 제공했습니다. 왕의 지루하다는 신호를 바로 알아채어 다른 주제로 대화를 유도할 만큼 눈치 또한 빨랐고요.

 

이런 그레빌 부인을 보며 에드워드 7세는 '접대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 칭찬했고, 그녀의 아버지 윌리엄 맥이완을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 그가 받은 접대에 대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재위 9년 만에 사망하면서 그레빌 부인의 사교계 입지 또한 작아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미 왕의 정부였던 앨리스 케펠은 사교계에서 아웃된 상황이었죠. 근데 다행히도 그레빌 부인은 보험용으로 들어놓은 게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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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왕비, 1911년

바로 다음 군주인 조지 5세의 왕비, 메리였습니다! 메리 왕비가 선왕과는 달리 유흥에 흥미를 보이지 않자 골동품 상점을 함께 구경하는 등 예술품을 좋아했던 왕비의 취향에 맞게 맞춤형 접대를 제공하며 일찍이 친분을 쌓아둔 것이죠. 그레빌 부인과의 우정은 메리왕비에게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이 무렵 윌리엄 맥이완이 사망하면서 그레빌 부인은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영국에서 제일가는 부자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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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빌 부인, 1920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레빌 부인은 폴스덴 레이시를 부상당한 장교들을 위한 요양원으로 개조하였고, 적십자 모금을 위해 소유했던 보석을 경매에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메리 왕비와의 친분)은 그레빌 부인이 1922년 대영제국 사령관 여기사(DBE)에 서훈되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이 기사 작위가 귀족이 되지 못했던 그레빌 부인의 아쉬움을 얼만큼 달랬는지는 모르겠네요ㅋ

 

왕족을 향한 그레빌 부인의 애정 공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차남인 요크 공작(훗날 조지 6세)이 백작 영애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만날 수 있도록 폴스덴 레이시를 만남 장소로 제공하였고, 1923년 그들이 결혼하자 신혼여행 장소로도 기꺼이 저택을 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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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스덴 레이시에서 신혼여행을 보내는 요크 공작 부부, 1923년

그레빌 부인은 이 젊은 부부를 좋아했고, 특히 요크 공작부인이 된 엘리자베스를 딸처럼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정말 자식처럼 생각했는지 폴스덴 레이시를 요크 공작 부부에게 물려주겠다고도 말했죠. 메리 왕비에겐 에드워드 7세의 우정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말했는데, 과연 진심이었을까요? 아님 단순히 왕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일까요? 후자일 확률이 높다고 봐요😂 (사실 요크 공작 이전에 그의 형인 웨일스 왕자를 포섭하려고 했으나 대차게 까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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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스덴 레이시 저택 앞 스페인 국왕 부부, 1920년

스페인 국왕 부부에게 폴스덴 레이시를 휴양지로 제공할 만큼 그레빌 부인은 영국 왕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왕족들에게 참~ 친절했습니다. 특히 왕족과의 친분을 들먹이며 으스대는 걸 즐겼는데, 이러한 그녀의 성격은 말보로 공작부인에게 보낸 방문 카드에 잘 드러나 있어요. "내일 밤 10시 반에 오시겠어요? 스페인 왕비를 위한 작은 파티가 있을 거예요. (추가로 적은 듯한 글씨로) 7월 1일 화요일 10시에 스페인 왕과 왕비 폐하를 만나는 작은 무도회에는 안 오시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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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폴스덴 레이시를 방문한 이집트 군주  (우) 마하라자를 만난 그레빌 부인

그레빌 부인의 왕족 사랑은 비유럽권 군주들도 예외가 아녔습니다. 그녀는 이집트의 왕, 인도의 마하라자 등을 폴스덴 레이시로 초대해 접대했으며, 서덜랜드 공작이라크의 왕을 위한 파티를 주최했을 때는 바로 초대해달라고 할 만큼 왕족과 친분을 쌓는데 늘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이런 그녀를 보고 여러 가지 말이 많았는데요.

 

작위를 받았던 최초의 사진작가, 세실 비튼은 "왕족만 보면 입가에 침이 고이는 욕심 많고, 속물적인 늙은 두꺼비 "라고 그녀를 비난했으며, 스트래스모어 백작부인 또한 "어떤 사람은 바다사자 물고기처럼 왕족을 먹여야 하나 봐 "라는 주어없는 저격을 했죠. 스트래스모어 백작부인의 딸이 나중에 그레빌 부인의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될 퀸마더라는 걸 생각해 볼 때 참 재밌는 에피소드 같아요ㅋㅋㅋ 아무튼 이런 비난에도 그레빌 부인은 왕족과 관계를 쌓는 걸 멈추지 않았고, 그들에겐 늘 좋은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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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배우들을 만난 그레빌 부인, 1936년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하고 장남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하였으나 재위 10개월 만에 퇴위하면서 차남 요크 공작이 조지 6세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레빌 부인은 새 국왕의 즉위 첫 만찬과 대관식 모두 초대받으면서 왕실의 가까운 친구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었죠. 그러나 그녀의 건강은 유럽 내 고조되는 전쟁의 공포와 함께 점차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2차대전이 발발하고, 이로 인한 사교계의 올스탑은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아진 그레빌 부인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무렵 그녀의 전쟁 전 친 독일 행보가 언론에 언급되면서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죠. 당시 몇몇 상류층들은 나치의 반유대주의 사상에 동조했는데 그레빌 부인 또한 그런 무리 중 하나였거든요. 물론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이 그렇듯 바로 태세 전환을 시전,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전투기 스핏파이어 생산에 약 6,000파운드를 기부하며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고 노력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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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그레빌 부인

상류층의 피난처로 각광받던 런던 도체스터 호텔에서 지내던 그레빌 부인은 전쟁 중임에도 자잘한 모임과 파티를 계속해서 주최했고, 호텔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배급의 곤란을 겪자 폴스덴 레이시에서 식재료를 직접 공수해 와 음식을 마련하는 정성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여전히 왕족에 대한 애정을 유지했기에 실각한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도 그녀의 스위트룸 손님 중 한 명이었죠.

 

1942년, 그레빌 부인은 78세의 나이로 런던 도체스터 호텔에서 사망했습니다. 생애 주장했던 대로 사망진단서에는 나이가 75세로 기록되었는데, 그레빌 부인은 자신의 신상 서류를 모두 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평생 불분명했던 출생 정보를 숨기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밝혀졌지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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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라 파커볼스와 엄마 로잘린드 큐빗 (로잘린드는 그레빌 부인의 대녀였으며 앨리스 케펠의 외손녀에요)

그레빌 부인의 유증이 신문에 실렸기 때문에 우리는 몇 가지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녀가 남긴 150만 파운드 이상의 유산은 하인들과 의사, 친구, 자선 단체, 13명의 대자녀, 그리고 왕족들이 나눠 물려받았습니다. 대자녀 중엔 카밀라 파커볼스의 엄마와 외할머니도 포함돼있었죠. 로잘린드 큐빗은 오백 파운드와 양식 진주, 모피를, 엄마 소니아 케펠은 이천 파운드를 물려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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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스페인 빅토리아 유제니 왕비  (우) 마가렛 공주

실각한 이후 그레빌 부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은 적이 있던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제니 왕비는 이만 오천 파운드를, 조지 6세의 둘째 딸 마가렛 공주는 이만 파운드를 물려받았습니다. 마가렛 공주 같은 경우, 차녀이기에 후계자인 언니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물려받을게 적을 것을 염두한 것이었는데, 이는 왜 그레빌 부인이 생전에 차남이었던 요크 공작에게 폴스덴 레이시를 물려주겠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가는 결정이었죠. 하지만 요크 공작은 조지 6세로 즉위했잖아요. 폴스덴 레이시는 약속대로 조지 6세가 물려받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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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스덴 레이시 저택 앞 조지 6세 부부, 1923년

그레빌 부인은 저택을 조지 6세가 아닌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여 대중들에게 공개되도록 하였습니다. 대신 엘리자베스 왕비(퀸마더)에게 자신의 화려한 보석 컬렉션을 남겼죠. 보석을 물려받게 된 퀸마더는 자신의 기쁜 심정을 시어머니인 메리 왕비에게 편지로 보냈고, 메리 왕비는 "보석에 대한 너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단다. (...) 난 너와 같은 행운이 없었어. 질투하는 건 아니고 그냥 한 말이란다. (...) 그 보석들이 저택의 상실을 보상하길 바란다. 그레빌 부인이 그녀의 결심을 바꾼 것은 안타깝지만 아마 (그 저택은) 왕에게 무용지물이 되었을 거야."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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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본셔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그레빌 부인, 1897년

당시에도 그레빌 부인의 화려한 보석 사랑은 유명했습니다. 전쟁 중인 상황임에도 에메랄드 보석을 화려하게 두른 채 손님들을 맞이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까르띠에부쉐론의 중요한 고객이었으며, 가지고 있는 보석들도 정기적으로 리세팅해 보석 트렌드를 따라갔습니다. 또한 강렬한 기원을 가진 보석들에게 끌렸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조세핀 황후의 에메랄드, 예카테리나 2세의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소유했다고도 알려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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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빌 부인의 보석이 담겼던 양철 트렁크

퀸마더에게 물려준 보석 목록이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보석들이 퀸마더에게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2012년 출판된 '여왕의 다이아몬드'를 보면 남긴 보석이 60여 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고, 현재는 이 책에서 공개된 몇 개의 정보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에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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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빌 부인

에드워드 7세부터 조지 6세까지, 영국 군주를 3대에 걸쳐 접대한 사교계 여주인, 그레빌 부인. 그녀가 남긴 보석들은 지금도 영국 왕실 일원들에 의해 착용되고 있으며, 그 보석 이름 앞에는 '그레빌'이란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적어도 보석을 착용하는 로열들은 그레빌 부인의 이름을 기억할 테니, 어찌 보면 왕실 팬(?)에겐 최고의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네요~

 

 

▼ 그레빌 부인이 남긴 보석 보러 가기

 

퀸마더의 그레빌 보석 컬렉션 (2) - 그레빌 부인이 남긴 보석 모음

▼ 그레빌 부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퀸마더의 그레빌 보석 컬렉션 (1) - 막대한 부로 왕족을 끌어모았던, 마가렛 그레빌의 일생 2차 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3년, MHG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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