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케네디(애칭은 재키)는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젊고 매력적인 퍼스트레이디였습니다. 그녀의 우아하고 세련된 패션 스타일은 '재키 스타일'이라고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죠. 그러나 단순한 패션 아이콘이 아닌, 열정과 야망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더 큰 목적을 달성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지향했던 재클린은 남자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는데요.
재클린은 약혼자보다 더 나은 조건의 남자가 나타나자 결혼 날짜까지 잡았던 약혼을 파기한 적도 있었고, 부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동생의 연인을 빼앗기도 했었습니다. 비록 그 과정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늘 그녀는 감정보다는 목적 지향적인 면모를 보여왔죠.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조건보다 사랑이 먼저인 때가 있었답니다💘 그 상대는 바로 프랑스 유학 중 만난 마퀀드 주니어로, 저명한 소설가 존 마퀀드의 아들이었습니다.
재클린은 재치있고 매력적이며 외모까지 출중한 마퀀드 주니어에게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무살의 재클린이 프랑스에서 풋풋한 연애를 즐기는 동안, 미국에서는 삼십 대에 접어든 존 F. 케네디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결혼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었죠.
존 F. 케네디는 1946년 29살의 나이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그의 당선엔 아버지 조셉 케네디의 후원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는데, 이때 선거비용으로 들인 돈이 최소 30만 달러, 오늘날 가치로 약 56억 원에 달했습니다. 조셉이 이렇게 거금을 투자했던 이유는 가문 내에서 반드시 대통령을 배출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는 싱글이었던 아들이 하원을 넘어 상원, 그 뒤로 더 높은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단란한 미국식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적당한 며느릿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수소문 끝에 재클린 부비에라는 젊은 여성을 알게 되었죠.
재클린은 케네디가와 같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으며, 상류층의 교양을 잘 갖춘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모든 조건이 조셉의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그는 지인에게 아들과 재클린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1951년 봄, 33살의 케네디와 21살의 재클린은 한 저녁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상당히 훈훈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케네디는 재클린에게 따로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른 여성들과 다르다는 걸, 매우 특별하다는 걸 느꼈음에도 불구하고요. 이후 재클린도 유럽 여행 중 재회한 전 연인 마퀀드 주니어와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케네디와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나는 듯했습니다.
재클린은 마퀀드 주니어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엄마 자넷은 가난한 남자와의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애원하는 자신의 뺨을 때릴 정도로 강하게 반대하자 결국 재클린은 마퀀드 주니어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죠. 이후 심리적으로 지쳐있던 그녀의 눈앞에 존 허스테드라는 예일대 출신 증권분석가가 나타났습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재클린은 만남을 가진 지 약 한 달만인 1952년 1월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처음 자넷은 이 조합을 꽤 마음에 들어 했지만 곧 예비사위의 벌이가 생각보다 시원치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이내 태도는 돌변했습니다. 결혼을 반대하기 시작했죠. 허스테드의 연봉을 알게 된 재클린의 망설임 또한 커져갔는데, 그 와중에 케네디가 9개월 만에 안부전화를 걸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대화에서 케네디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재클린이 눈치채 버렸거든요ㅎ
재클린은 취재를 핑계로 케네디의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를 맞이한 건 바로 다음날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던 케네디였습니다.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케네디의 건강은 상당히 안 좋은 편이었고, 이날도 며칠 전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앓고 난 뒤 회복 중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아, 재키, 오랜만이에요." 고급 가죽 의자에 앉아있던 케네디가 힘겹게 일어서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재클린은 마지막으로 봤던 저녁 모임에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그를 보며 잠시 놀랐지만 이내 안부를 물어보며 취재와 관련된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에 대답하던 케네디가 갑자기 재클린의 손가락에 끼워져있던 커다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가리켰습니다. "이 행운의 남자는 누구인가요?" 그가 물어보자 재클린은 "꿈에 그리던 사람을 찾았어요."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기사 속 약혼자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죠.
재클린은 허스테드와 결혼하면 그저 그런 가정주부로 평생 지루하게 살게 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반면 케네디는 위험하지만 모험을 해볼 만한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였죠. 결국 그녀는 약혼을 파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허스테드가 준 사파이어 약혼반지를 그의 재킷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으며 파혼을 통보했는데, 나중에 허스테드는 옛 연인 재클린이 '얼음처럼 차가웠다'라며, 마치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고 회상했죠.
무더운 여름 주말, 케네디는 재클린을 가족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케네디가를 미국의 로열 패밀리에 올려놓은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도 있었죠. 조셉은 자신이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둔 재클린에게 "존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걱정할게 하나도 없단다. 만약 내 아들이 너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살펴보마."라고 말하며 케네디가의 재력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재클린 또한 매력적인 케네디와의 결혼을 간절히 바랬는데요. 그러나 이후 펼쳐진 상황들은 그녀에게 당혹감을 선사했습니다.
케네디는 선거운동을 하는 몇 달 동안 재클린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며, 이는 상원으로 당선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에 재클린을 초대하기도 했지만 태도는 계속 무심했죠. 그러다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전화를 거는 등 그녀를 계속 애태우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청혼을 받지 못해 불안해하는 딸을 보며 자넷은 한 달 동안 영국 출장을 권유했습니다. 재클린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 존을 한번 만날까요?"라고 묻자 "안돼, 존에게 네가 너무 바쁘니 돌아와서 본다고 하거라."라고 말하며 연락을 자주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자넷의 전략은 제대로 통했고, 영국에 온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케네디는 재클린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약혼이 처음 발표되던 날 재클린은 약혼반지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기자가 반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아직 없어요. 존과 함께 여러 개를 살펴봤지만 몇 개는 마음에 안 들고, 다른 것들은 적당한 형태가 아니더라고요."라고 대답했죠. 결국 아들이 그런 감성적인 보석에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조셉이 발 벗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약혼반지를 대신 고르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조셉은 이미 재클린의 웨딩드레스까지 신경 쓸 정도로 결혼식 전반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조셉은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뉴욕 5번가의 반클리프 아펠을 방문했습니다. 브랜드의 설립자 중 한 명인 루이 아펠이 그를 격하게 환영하며 가게 뒤쪽 방으로 안내했고, 그곳에는 루이의 아름다운 아내 헬렌 아펠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사님, (반지를 착용할) 숙녀분의 사진을 가져오셨나요?"라고 루이가 묻자 조셉은 고개를 저으며 가져오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다행히도 헬렌이 약혼으로 화제가 된 재클린을 잘 알고 있었죠. 루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 명의 판매원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명은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반지>를, 나머지 한 명은 루비 팔찌와 다이아몬드 나뭇잎 핀 브로치를 착용한 채였습니다.
루이 아펠이 보여준 반지는 2.84캐럿 에메랄드와 2.88캐럿 다이아몬드를 센터 스톤으로, 점점 가늘어지는 형태의 바게트컷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밴드에 부분적으로 세팅된, 투아 에 무아(Toi et Moi, 두 개의 보석이 나란히 장식된 반지) 스타일의 반지였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선물한 투아 에 무아 약혼반지에서 영감을 받은 거 같은데요. 많은 보석 중 에메랄드를 선택한 이유도 케네디가가 아일랜드계였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상징☘인 초록색 보석을 선택한 거 같고요. 이후 반지와 팔찌, 그리고 브로치 각각의 품질과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들은 조셉은 "이 보석들을 하이니스 포트로 보내주게."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 보석들이 재클린이 가진 첫 번째 진지한 작품들이 될 거라고 덧붙였죠. 루이 아펠은 가격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어주었고, 조셉 또한 가격을 묻지 않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그해 9월 열린 케네디와 재클린의 결혼식에는 외교관, 국회의원 등을 포함 700명 이상의 하객들뿐만 아니라 이를 취재하기 위해 참석한 기자들,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몰려든 지지자들로 인해 북적거렸습니다. 케네디가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드는 동안, 보안을 위해 동원된 경찰들이 상원의원과 그의 새 신부에게 다가가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고군분투하였죠.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마치 대관식을 보는 듯했다고 해요.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재클린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그녀의 섬세한 웨딩드레스도 여러 기사에서 호평을 받으며 함께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재클린은 프랑스 디자이너의 단순하고 모던한 웨딩드레스를 선호했지만 조셉은 반드시 미국인 디자이너의 작품이어야 된다며 전통적인 디자인의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착용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이 결혼식은 가족행사가 아닌 정치 행사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재클린은 시아버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죠. 결국 웨딩드레스는 당대 사교계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디자이너 앤 로우가 제작했는데, 재클린은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해요. (가슴이 작아 보인다고 불평했다는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웨딩드레스는 재클린의 아이코닉한 패션 중 하나로 손꼽힌답니다.
이후 열린 웨딩 리셉션에서는 예식보다 더 많은, 900명이 넘는 손님들이 참석했고, 재클린은 2시간 넘게 그들 모두와 악수를 해야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죠.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 수백 명과 다 악수하고 나서야 재클린은 겨우 흰 장갑을 벗을 수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결혼반지인 골드링과 함께 약혼반지인 <반클리프 아펠 에메랄드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같이 착용한 목걸이는 재클린의 가족 보석이었으며, 팔찌는 케네디가 결혼식 전날 선물로 준 다이아몬드 팔찌였습니다. 웨딩드레스 가슴 부분엔 시부모님의 선물인 반클리프 아펠 다이아몬드 핀 브로치가 있었고요.
많은 사람들이 미남에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 케네디와 아름답고 지적인 재클린을 완벽한 커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실상은 그렇지 못했죠. 결혼 전부터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케네디의 바람기는 몹시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는 결혼 기간 내내 재클린을 괴롭혔습니다. 1956년, 첫아이를 사산했을 때도 케네디는 지중해에서 다른 여성들과 휴가를 보내고 있었고, 아내의 사산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귀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여성편력을 그저 무시하려고 했던 재클린이었지만 이 사건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혼까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러나 아들의 경력에 이혼이란 흠이 생길까 염려했던 조셉이 수십만 달러를 일종의 위로금 명목으로 보내며 재클린을 회유했고, 엄마와 여동생까지 이혼을 반대하자 결국 남편의 지독한 바람기를 참고 넘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958년,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면서 2년 뒤에 있을 대선의 유력한 대권 후보로 주목받게 됩니다. 재클린 또한 뛰어난 패션 스타일과 젊고 우아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죠. 이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1960년,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등극하게 됩니다.
현직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케네디는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재클린은 당선 2주 후 아들 케네디 주니어를 낳았는데(훗날 주일 미국 대사가 될 큰딸 캐롤라인 케네디는 3년 전 태어남), 지금까지도 당선자 시절 아기를 낳은 유일한 퍼스트레이디로 남아있답니다.
드디어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31살의 젊은 퍼스트레이디 재클린은 그곳의 내부를 보고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실내 장식들이 너무 낡아 마치 옛날 호텔에 온 것 같다고 불평했죠. 곧 재클린의 지휘 아래 백악관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습니다. 재클린은 골동품을 기증해달라고 수집가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전임 대통령들의 가구를 되살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처음으로 사적인 공간에 촬영팀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재클린의 백악관 투어 방송은 극찬을 받으며 기록적인 수의 8천만 시청자를 끌어모았고, 이 효과로 복원 프로젝트에는 기부가 쏟아졌습니다. 영부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재클린은 1962년 초 <에메랄드 약혼반지>를 리디자인하기로 결심했는데요.
재클린은 반지 구매처인 반클리프 아펠에게 반지를 리디자인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브랜드 측은 리폼한 반지 모형을 보내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지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영부인의 개인비서였던 메리 갤러거는 반지 리폼이 재클린의 대형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고 회상하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죠. "재키는 결정을 내리기 전, 제 의견을 물어보았고, 전 '이건 부피가 너무 커서 반지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앗아가는 거 같아요.'라고 대답했어요. 제 말에 재키는 '존이랑 의견이 똑같네요.'라고 말했죠." 비서와 케네디 모두 리디자인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재클린은 반지 리폼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백악관으로 반지가 배달되었는데, 원래 있던 바게트컷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총 1.46캐럿의 마퀴즈컷 다이아몬드와 총 0.66캐럿의 라운드컷 다이아몬드로 대체되어 이전보다 훨씬 화려해진 모습이었죠.
화려하게 바뀐 <반클리프 아펠 약혼반지>는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재클린의 자신감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유럽 순방에 나섰던 케네디가 "저는 재클린 케네디와 동행해 파리에 온 남자입니다."라고 농담할 정도로 재클린은 미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재치 있고 지적인 면모 또한 냉엄하고 딱딱한 외국 지도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요. 케네디는 자신이 강하지 않은 영역에서 활약을 보여주는 아내를 중요한 외교적 자산으로 여겼지만 여전히 좋은 남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마릴린 먼로를 비롯 여러 여자들과 계속 바람을 피워댔는데, 그중에는 백악관 직원들도 다수 있었죠. 재클린은 그럼에도 남편을 사랑했고 영부인으로서의 자신의 삶 또한 사랑했기에 그저 모른 척 인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면서 남편과 집과, 일 모두를 한순간에 잃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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